채림의 작업은 눈으로 확인되는 형상보다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화면에서 형태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대신 아주 느리게그러나 분명하게자라난다. 이러한 발생적 리듬은 메를로퐁티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Theinvisible)이 보이는 것(Thevisible)에 스며들어 형상을 생성하는 지각의 층위”와 맞닿아 있다. 전시 제목 ‘Ontogenesis’는 바로 이처럼 감각적 형상이 태동하는 과정, 즉 육안으로는 인지되지 않는 생성의 흔적들이 조형 언어로 전환되는 순간을 지시한다.
Courtesy of Artist and THEO
전통과 현대, 회화와 공예, 자연과 우주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가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래도록 한국 현대미술 담론의 핵심 과제였다. 단색화 이후 물성 중심 회화는 “재료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조형적 사고를 확장했고, 미니멀리즘의 구조적 사고는 “작품과 지각의 관계”를 다시 규정했다. 그러나 채림의 작업은 이러한 계보에 단순히 위치하지 않는다. 그녀는 옻칠, 삼베, 한지, 보석처럼 서로 다른 기원과 시간성을 지닌 요소들을 혼융시키며, 브뤼노 라투어가 말한 (Hybridassemblage : 자연, 기술, 감각, 신체가 동등한 층위에서 얽히는 생성체의 형태를 구성한다. 이 혼융은 단순한 전통의 확장이 아니라, 재료 간의 만남을 통해 또 다른 존재적 발생 방식을 발명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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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옻칠 화면은 깊고 캄캄한 공간을 펼쳐 놓으며, 빛은 순간적으로 번쩍이지 않고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느리게 환해진다. 이 ‘미세하게 태어나는 빛’의 구조는 바슐라르가 설명한 물질적 상상력의 깊은 시간을 상기시키며, 화면 위 오브제들은 산알처럼 솟아올라 작은 탄생의 사건을 구성한다. 이러한 ‘느리지만 분명한’ 운동성은, 동아시아 미학에서 오래도록 논의된 무상(無相)의 형상(없꼴의 꼴, 없몬의 그림)과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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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작업에서 채림은 한지의 구김과 삼베의 숨결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재료가 지닌 고유한 시간성과 기원을 화면 위로 호출한다. 이는 잉골드의(Materialsinthemaking) 재료가 만들어지며 동시에 세계를 생성하는 방식과 유사한 관점을 따른다. 제주 쇠소깍에서 받은 영감은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경계적 장소성과 연결되며, 이 경계의 흐름은 색과 빛의 생성 방식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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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채림의 작업이 묻는 것은 “무엇이 보이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탄생하고 있는가”이다. 아주 느린 확장, 미세한 생장,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패턴의 흐름은 제임슨이 말한 표면의 깊이(Depth of thesurface)처럼, 외형 너머에 존재하는 생성의 구조를 드러낸다. 존재는 대개 조용히 태어나지만, 그 생성의 움직임은 분명하게 감지된다. 채림의 작업은 그 느리고 분명한 순간을 다시 우리 앞에 가져온다.